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88 서울 올림픽 (문단 편집) ==== 독재정권 종식 및 정치적 변화 ==== [youtube(goskrEq43IQ)] 또한 전두환의 [[대한민국 제5공화국|제5공화국]] 정권의 종식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올림픽 개최 시도 자체는 박정희 정권 말부터 시작됐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집권기간 내내 민주화 운동을 '[[종북몰이|좌경폭동]]'으로 매도하며 탄압했으나, [[6월 항쟁]] 이후 [[6.29 선언|사실상 항복을 선언했고 이후에 대통령 직선제로 개헌]]을 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올림픽'''이었다. 올림픽 개최까지 1년도 안 남은 상태에서 더 큰 유혈사태로 번진다면 대규모 보이콧 사태를 맞고 올림픽 개최 자체를 포기해야할 수도 있다 보니 전두환이 물러 서고 직선제를 수용한 것이다. 전두환 정부는 올림픽 개최를 통해 정권의 정당성을 홍보하려 했으니, 사실상 정권의 선전 목적으로 올림픽을 멋대로 어용하려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부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아시안게임]] 및 올림픽 개최 준비를 하면서 이를 명목으로 들어서 야당과 민주화 운동 진영에서 논의되던 민주화 논의를 무시하고 있었다.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을 때도 '''서울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라는 이유가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가 1987년 [[6월 항쟁]]이 일어나자 전두환 정부는 계엄령 선포 및 시위대 유혈 진압을 계획했다. 그러나 이미 올림픽으로 외신들이 한국에 많이 들어와 있고 [[김수환|김수환 추기경]], [[정의구현사제단]] 같은 가톨릭계도 적극적으로 나서는 상황에 계엄령을 선포했다간, 곧바로 대규모 보이콧 사태에 직면하고 올림픽 개최가 취소와 더불어 개최지가 변경되면서[* 실제로 IOC는 6월 항쟁 상황을 예의주시하며 개최지를 1988 올림픽 유치 과정 중 최종 탈락한 '''일본 [[나고야]]'''로 변경할 플랜 B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며, [[독일]] [[베를린]] 또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또한 옵션으로 거론되었다. 이는 당연히 민족감정상 좌시할 수 없는 일인 것.] 지금껏 모든 수고가 수포로 돌아갈 가능성이 높았다. 결국 정부는 시민의 압력에 굴해 [[6.29 선언]]을 발표해 [[대한민국의 민주화 운동|민주화 개헌]]을 추진해야만 했다. 정권에 도움이 되라고 유치한 서울 올림픽이 [[자가당착|오히려 정권의 명줄을 끊은 셈]].[* 그러나 군부정권이 마음만 먹는다면 나라의 미래든 국제 제재든 상관없이 [[멕시코]]나 [[아르헨티나]]처럼 유혈 진압을 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그랬으면 역쿠데타로 종말했겠지~~ 실제로 멕시코는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를 앞두고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 정권의 [[구스타보 디아스 오르다스#s-3.1|틀라텔롤코 광장 학살 사건]]으로 시위대에 있는 대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죽였으며, 아르헨티나는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 중에 [[호르헤 라파엘 비델라]] 정권이 정치범을 잔인하게 고문한 것으로 인권탄압을 지속했다. 이것들이 두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난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지만, 축제 후의 두 나라의 경제는 처참하게 됐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전두환 정권이 시민들을 유혈 진압해서 6월 항쟁을 끝났다면, [[바티칸]]의 [[교황청]]이 [[유럽]]과 [[라틴아메리카]][* [[멕시코]] 이남 국가들.]의 [[가톨릭]] 국가들에게 서울 올림픽의 전면적인 [[보이콧]]을 호소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앞서 상술했듯 IOC에서도 당시에 개최국 변경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고 한다. 자유주의 진영의 리더로서 공산권에 대한 견제 효과를 노린 미국의 입장에서도 서울 올림픽이 무산되면 뒷목을 잡을 일이라서 과거 [[5.18 민주화운동]] 때와는 달리 묵인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전두환을 압박했다. 이런 국제적 압박 속에 올림픽 때문에 외신 기자들도 잔뜩 방문한 판국이라서 올림픽만큼은 어떻게든 개최해야만 했던 전두환은 결국 유혈진압을 포기함으로써 사실상 항복을 선언한다. 게다가 노태우가 '관중들이 전두환을 보고 야유를 하는걸 외국인들이 보면 [[나라 망신|국제망신]]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전두환을 올림픽 개회식에 참석 못하게 하는 아이러니한 일도 발생한다. '''전두환은 결국 노태우가 올림픽 개회선언을 하는 것을 자기 집에서 TV로 지켜만 봐야했다.'''[* 이건 2005년 MBC 특별기획 드라마 [[제5공화국(드라마)|제5공화국]]에서도 그대로 묘사되었다. 노태우가 개회식을 하는 것을 보면서 "재주는 누가 넘고 돈은 누가 번다더니"라며 분개해 하는 [[이순자]], 착잡한 표정의 가신들, 그리고 회한으로 눈시울을 훔치는 전두환의 모습은 덤. 전임 대통령이자 개최에 큰 도움을 준 전두환을 귀빈석에 위치시키는 것은 별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노태우는 그렇게 하지 않은 것.] 그리고 이때부터 전두환과 노태우의 관계는 험악일로를 걷게 된다. 이는 화합의 대제전인 올림픽이 오히려 두 사람의 사이를 완전히 갈라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또한 이것이 결국 [[백담사]]행의 서막을 올리게 된다. 그리고 서울 올림픽과 그 뒤 시작된 [[동유럽 혁명|동구권과]] [[소련 붕괴|소련의 붕괴]]는 한국 국내 강경 좌파 그룹들의 속성을 크게 변화시켰다. [[사회주의]]보다는 [[사회민주주의|사민주의]]를, 사민주의보다는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목소리가 늘어났으며, 그 가운데 가장 격렬한 변화는 [[민중당(1990년)|민중당]] 계열에서 일어났다.[* 민중당 계열 그룹들은 1990년대 초반까지도 진보정당 운동에 매진하였다.(애초에 민중당이 창당된 것이 1990년도였고...) 이들이 보수로 돌아서게 된 건 1996년 [[15대 총선]]을 전후해 [[김영삼]]이 이들 인사를 영입하면서부터였다.] 운동권 출신 재벌총수 이의범 [[SG그룹]] 창업주도 해당 올림픽을 계기로 [[https://www.mk.co.kr/news/business/view/2015/02/105294/|노동운동을 접었다고 밝혔다.]] 제5공화국(전두환 정부)에 반대했던 인사들도 서울 올림픽에 대해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김준엽]] 전 고려대 총장은 1990년에 낸 자서전 <장정> 4권에서 올림픽에 대해 찬사를 아끼지 않는 한편, 3년 전 자신을 총장직에서 쫓아낸 전두환에 대해서 "독재자로서 죄가 많지만, 올림픽 유치와 물가안정 등 공로도 있다"고 평가했다.[* 원 출처: <장정 4: 나의 무직 시절> p309~310.] [[김영삼]]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도 1988년 9월 22일 중앙일보 창간기념 특별 서면회견에서 "올림픽으로 고양된 국민의 자부심과 사회의 다양성, 민주화의 자신감은 소수 군인들의 쿠데타 및 좌경민중혁명을 없앨 수 있다"고 발언했다.[* 원 출처: <김영삼 회고록: 민주주의를 위한 나의 투쟁> 3권 p157.] [[조영래]] 변호사도 서울 올림픽을 가리켜 "한민족 5000년사에 길이 남을 엄청난 쾌거"라고 평가한 바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